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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잘 지내요?
언니를 언니라 불러보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요.
실은 오늘 언니 이름을 보고도, 언니가 언니인지 몰라 한참을 쳐다봤어요.
- 289p, 김애란, <서른>
친근한 말투로 시작하는 오늘의 소설은
김애란 작가의 단편소설 <서른>입니다.
이 소설은 한 여자가 옛날에 알고 지내던 언니에게
아주 오랜만에 보내는 편지의 형식을 하고 있습니다.
친근한 말투에 가벼워보이는 편지지만
편지를 읽어나갈 수록
그 뒤에 숨어있던 충격적인 내용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 편지는 10년 전에 만났던 언니에게서 온 편지를 읽고
그녀가 써내려가는 답장입니다.
그녀와 언니는 아주 오래 전 노량진에서 만났습니다.
그녀는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재수를 하러 왔고
그녀보다 다섯살 많은 언니는 임용고시를 준비하러 왔죠.
그들이 있던 곳은
제대로 된 방도 따로 없이
잘 때는 의자를 책상에 올리고
책상 밑에서 잠을 청해야 했던 독서실이었습니다.
이천원도 되지 않는 식사값을 아끼기 위해
천원짜리 빵을 사먹거나 도시락집에서 밥만 시켜 먹던
그들의 현실은 녹록치 않았지만
그때 그때 그들의 앞에는 꿈이 분명 존재하였습니다.
그녀는 1년 뒤 J대학 불문과에 합격해 독서실을 떠나게 됩니다.
그녀는 떠나기 전
끼니 대신 천원짜리 빵을 사먹으며 적립했던
만 원가량 적립금이 쌓여있는 포인트카드를 언니에게 줍니다.
그녀와 언니에게 모두 정말 값진 선물이었죠.
그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인연이었습니다.
언니는 10년 만에 편지와 함께 포인트카드를 동봉하여 그녀에게 보냈습니다.
편지 속에서 언니는 자신의 근황을 이야기하죠.
8년간 임용고시에 떨어졌지만 결국 합격하였고
누군가와 결혼하여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단 소식이었습니다.
그녀는 언니의 성공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그간의 자신의 삶을 한 자 한 자 풀어놓게 됩니다.
대학을 입학한 후에도
그녀의 삶은 여전히 어려운 형태로 놓여있었습니다.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휴학과 복학을 번갈아 하며 여러 일들을 해야했죠.
자잘한 아르바이트들로 푼돈을 벌고
‘마루타 알바’라 불리는 병원 생동성 시험이나
인근 보습학원 강의로 어느 정도 돈을 벌었습니다.
그녀는 학원 강사 일을 하며 따스함을 많이 느끼게 됩니다.
비록 전공을 속이며 학원에서 강의를 했지만
아이들은 그녀를 매우 잘 따랐죠.
그래도 누군가 그렇게 저한테 어려움 없이 안기면
걔들과 결코 오래 볼 사이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가슴 한쪽에 슬며시 온기가 퍼지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왜 물이 한가득 든 투명한 비커 안에 스포이트로 잉크를 한 방울 떨어뜨리면
순식간에 뭉게구름이 생기며 액체의 성질이 바뀌게 되잖아요?
그때 제 마음이 그랬던 것 같아요.
- 296-297p, 김애란, <서른>
하지만 그녀는 언니에게
요즘 하얗게 된 얼굴로 학원가를 오가는 아이들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고 말합니다.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어려운 상황 속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학생들을 보며
그녀는 어째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일까요?
다시 그녀의 삶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그녀는 휴학과 복학을 번갈아 한 덕에
천만 원가량의 학자금 대출과 함께
7년만에 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취직만 하면 어떻게든 갚을 수 있다 생각했지만
불문과 출신에 나이가 많고 용모도 그저 그런 그녀를
어느 회사도 뽑아주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집안이 극도로 어려워지게 됩니다.
아버지의 친구가 아버지의 트럭을 빌려 사고를 냈기 때문이죠.
사고를 낸 친구는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고
그녀의 아버지가 모든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가뜩이나 어려웠던 집안은
복구가 안 될 정도로 폭삭 주저앉고 맙니다.
너무나도 힘들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던 그때,
3년 전 헤어진 전남친에게서 연락이 옵니다.
그녀와 만나고 싶다고 말이죠.
그는 학원에서 만난 국문학과 대학원생이었습니다.
사치를 하거나 사채를 쓴 것도 아니고
논문만을 열심히 썼던 그는 헤어질 때 30대 초반의 신용불량자의 상태였죠.
말쑥한 차림새에 좋은 혈색이 된 그는
담담하게 그녀와 소주잔을 기울이며 말합니다.
‘나 이제 돈 잘 벌어.’
그리고 그는
자신이 받았던 것처럼 그녀에게도 도움을 주고 싶다며
그녀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두 달 뒤
그녀는 한 달에 삼백 많으면 천만원도 벌 수 있다는
이상한 회사에 들어가게 됩니다.
처음엔 그녀도 허황된 말들을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 번만 들어보고 정말 나쁜 곳이라면 자신을 꺼내달라는 전남친의 말에
그녀는 사당 지하 강당에서 진행되는 3박4일 연수를 들었고
다단계가 아니라 선진국형 신개념 네트워크 마케팅이라는 말과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이 노력만으로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절박했던 그녀의 발걸음은 합숙소를 향하게 됩니다.
어쩌면 그녀는 꿈이,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필요했을 지도 모릅니다.
합숙소에 들어서자 마자
그녀는 휴대폰을 빼앗긴 채
자신이 아는 모든 사람에 대한 정보를 적어야 했습니다.
나이, 성별, 거주지는 물론
학력, 콤플렉스, 종교, 건강 상태, 군필 여부, 타지 생활 경험 유무까지
그녀는 무언가 잘못 되어간다 느꼈지만
믿어야 할 다른 희망도, 잘못을 인정할 용기도 없었습니다.
그녀는 합숙소에 갇혀
자신은 사람들을 감시하고
사람들은 그녀를 감시하며
오랜기간 동안 다단계 일을 하게 됩니다.
자신이 아는 모든 사람에게 전화를 돌리며 상품을 판매하고
감금되어 지내다 새벽이 되면 말끔히 정장을 입고 사람을 만나며 말이죠.
돈을 벌기는 커녕 빚은 점점 늘어가고
인간관계는 모두 파탄나버리고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버립니다.
그녀가 자신이 아는 모든 지인들에게 연락을 돌리고
더이상 매출이 늘지 않던 때쯤
모르는 번호로 연락이 옵니다.
‘샘 잘 지내요? 그냥 낙엽 보니까 샘 생각나고 궁금해서 문자했어요.’
문자를 한 이는
학원에서 일할 때 가르쳤던 학생 혜미였습니다.
담배 냄새를 풍기면서 서슴없이 그녀에게 안기고
시도 때도 없이 시시껄렁한 문자를 보내던,
팍팍했던 그녀의 삶에 온기를 퍼트린 학생이었죠.
이곳을 떠나고 싶었던 그녀는
자신이 아끼던, 아무 것도 모르는 혜미를
자신의 자리에 앉히게 됩니다.
더 이상 그녀에게서 빼낼 것도 없었던 회사도 그녀를 놓아줍니다.
결국 그녀는 합숙소를 나오게 됩니다.
그녀는 더이상 선량한 피해자이기만 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냉혹한 가해자이기도 한 것입니다.
혜미는 합숙소에 들어간 뒤로도 몇 번 연락을 하지만
죄책감인지 부끄러움인지 그녀는
혜미의 연락을 모두 무시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언니에게 편지를 받기 얼마 전
혜미가 엄청난 빚과 파탄 난 인간관계를 견디다 못해
자살시도를 했단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뇌에 무리가 가 식물인간이 되었다는 소식을 말이죠.
그녀는 혜미가 있는 병원에 가고 싶지만
쉽사리 용기를 낼 수 없다고 언니에게 고백합니다.
그리고 만약 이 편지를 언니가 읽고 있다면
자신이 병원에 찾아간 것이라고 이야기하죠.
이제 편지의 마지막 부분이자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언니, 저를 기억해주어 고마워요.
그리고 제게 고맙다고 말해줘서 고마워요.
전 그런 얘기를 들을 만한 사람이 아닌데…
그럴 자격이 없는데…
제가 오늘 언니에게 무얼 받았는지 전하기 위해 이 편지를 써요.
언니는 그게 뭔지 이미 알고 있을 테지만.
언니가 준 것과 내가 받은 것은 다를 수도 있으니까요.
잘 지내요, 언니.
언니가 정말 잘 지내주었으면 좋겠어요.
기회가 된다면… 만일 그럴 수 있다면, 또 쓸게요, 언니.
- 318p, 김애란, <서른>
언니의 소포 속 들어있던 포인트 카드는
단순한 과거의 추억이 아니라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꿈과 희망이 있었던 때
순수한 마음으로 타인을 대하던 때를
오롯이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인 것입니다.
이 편지를 쓰기 위해 그녀는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야 했을까요?
그리고 이 편지를 보내기 위해
그녀는 훨씬 큰 용기를 내야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 소설이 가장 쓸쓸하면서도 잔인한 건
이 편지가 보내진 편지라는 힌트가
소설 어디에도 나와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과연 서른은 어떤 시기일까요?
이미 꿈과 희망을 지나왔고 돌아갈 수 없다고 인정해야 하는 시기?
아니면 자신이 저지른 잘못들을 용기내어 마주해야 하는 시기?
당신의 서른은 어떤 모습일까요?
당신의 서른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지금까지 김애란의 소설 <비행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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